창작 번역시

노비계약서

ACE2021 2026. 10. 22.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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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계약서

 

 

계약서는 약속을 글로 남긴 문서다. 사람들은 계약서를 통해 서로의 권리와 의무를 확인하고, 앞으로 지켜야 할 약속을 분명히 한다. 집을 빌리거나 물건을 사고팔 때, 혹은 회사에 취직할 때도 우리는 계약서를 작성한다. 계약서는 서로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든 계약서가 공정한 것은 아니다. 한쪽이 지나치게 강한 힘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쪽이 선택권을 잃은 상태에서 작성된 계약서는 약속이라기보다 강요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노비계약서’라는 말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조선 시대의 노비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다른 사람에게 예속된 신분이었다. 노비는 주인의 집안일을 하거나 농사를 지었고, 때로는 자신의 가족과 함께 주인의 재산처럼 취급되었다. 노비에게는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하거나 거주지를 옮길 권리가 거의 없었다. 그들의 삶은 태어난 순간부터 정해져 있었으며,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만으로 신분을 바꾸기도 어려웠다. 이러한 현실을 문서로 기록한 것이 노비문서나 노비계약서였다. 그러나 그 문서에 적힌 내용이 노비의 진정한 동의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고, 설령 내용을 안다고 해도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법적으로 노비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자유롭게 태어나고, 직업을 선택하며, 자신의 삶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도 마치 노비계약서처럼 사람을 옭아매는 계약이 존재한다. 지나치게 긴 노동시간을 요구하는 근로계약서,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계약서, 퇴사를 어렵게 만드는 조항, 빚을 이유로 사람의 선택을 제한하는 약속이 그렇다. 겉으로는 자발적인 계약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쪽이 생계를 잃을까 두려워 어쩔 수 없이 서명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사회 경험이 적은 청년이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은 부당한 계약을 알아도 쉽게 거절하지 못한다. “싫으면 다른 사람을 구하면 된다”는 말을 들으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어렵다. 계약서에 서명하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했다고 생각하지만, 그 선택이 정말 자유로운 것이었는지 묻게 된다. 선택지가 하나뿐인 상황에서 이루어진 결정은 형식적으로는 자유일 수 있어도 실질적으로는 강요와 다르지 않다.

나는 계약의 핵심은 서명이 아니라 존중이라고 생각한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내용이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다. 계약 당사자들이 동등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는지, 불이익을 충분히 설명받았는지, 거절할 수 있는 현실적인 권리가 있었는지가 중요하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무지를 이용하거나 절박함을 악용한다면, 그 계약은 법적 형식을 갖추었더라도 도덕적으로 공정하지 않다.

노비계약서라는 말은 과거의 낡은 문서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을 한 사람의 인격체가 아니라 소유물이나 도구로 바라보는 태도를 상징한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누구도 다른 사람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회사와 노동자, 집주인과 세입자, 판매자와 소비자는 서로 다른 위치에 있을 수 있지만, 모두 인간으로서 존엄과 권리를 가진다.

따라서 계약서를 작성할 때는 문장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펴야 한다. 모르는 내용이 있다면 질문하고, 이해되지 않는 조항은 설명을 요구해야 한다. 부당한 내용을 발견했을 때는 혼자 감당하지 말고 주변 사람이나 관련 기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동시에 사회는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겨서는 안 된다. 약한 사람이 부당한 계약을 거부해도 생존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가 보호해야 한다.

계약서는 사람을 묶기 위한 문서가 아니라 서로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약속이어야 한다. 만약 한쪽의 자유를 빼앗고 다른 한쪽의 이익만 보장한다면, 그것은 계약서의 모습을 한 지배의 도구일 뿐이다. 우리는 과거의 노비제도를 비판하면서도, 오늘날 비슷한 형태의 억압이 반복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진정으로 공정한 사회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이름으로 자유롭게 서명할 수 있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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